7월 22일 화요일
그러니까 리트 시험을 보고 이틀 후에, 한 달을 꼬박 기다려왔던 비행기를 타러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부터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잊도록 하고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과, 또 좋아하는 사람이 활짝 웃는 얼굴을 마침내 볼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지하철을 탔다.
그러고 보니 배낭을 멜지 캐리어를 끌지에 대한 고민도 했는데, 아무 고민 없이 배낭에 짐을 담았다가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님을 떠올려 출발 직전에 급하게 캐리어로 짐들을 모두 옮겼다. 이번 제주도 여행이 배낭 여행의 느낌보다는 휴양의 느낌, 여유롭고 쾌적한 느낌이길 원하고 있었다.
김포에서 2시 출발 비행기였는데, 제주공항에 도착하면 채영이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아침부터 바다 수영을 하고 오겠다는 채영이의 말에 아침부터 그렇게 놀면 힘들지 않은가? 나한테 조금 더 집중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한 달이나 기다리던 날인데.. 아침부터 다른 체력을 써야할 일을 하고 와도 될만큼 아직은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은 아닌가보다. 하고 벌써 되지도 않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건 끊임없이 놀 수 있다는 채영이의 자신감 같기도 해서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매력이라서 내가 좋아했었는데 잠깐 잊었다가 다시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이, 나는 얼른 내가 채영이를 얼만큼 지금 좋아하고 있는지를 빨리 말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렇게 커진 마음을 빨리 말해주고 싶어서, 전날밤에 공들여쓴 편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어둔 중학생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 마음은 내가 한달이 넘도록 적어간 마음이었다. 정말로 소중하고 빛나게 닦아서 좋은 부분만 남긴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무튼 채영이는 좀 늦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채영이는 자기가 제주공항에서 나를 맞이해주겠다고 꽤 전부터 얘기를 했는데, 그래서 나도 그에 맞추어 어떻게 행동할지 행복한 상상을 몇 가지 했다. 악수하기나 포옹하기 둘 중에 하나를 하고 싶었다.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웃음은 날테니까 그 다음에 내 감정에 솔직한 행동을 생각하자면 포옹하기였다. 한 달 동안 너무 보고싶고 그리웠다고 꼭 안아주고 싶었다. 감격의 포옹 같은 느낌이 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채영이가 늦게 올 수도 있다고 하면서, 내가 상상했던 그림은 깨지겠거니 하여 조금은 아쉬웠다.
채영이를 만났다. 내 비행기가 연착이 조금 되고, 수하물을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어서 채영이는 늦지 않았다. 게이트를 나오면서 곧장 전화를 했고, 30초쯤 후에 웃는 얼굴의 채영이를 만났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남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연인도 아닌데 고마움 70%의 마음으로 꼭 안아줬다. 사실은 난 바로 포옹하려고 했는데 채영이가 악수를 먼저 건네서 악수를 하고 나서야 안을 수 있었다. 처음 느끼는 품이었다.
곧바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뽑아들고 채영이가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받으러 발걸음을 뗐다. 렌터카 시장은 쏘카가 점령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제주도는 쏘카보다 기존 렌터카 업체들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듯 했다. 제주공항을 나서면 렌터카 업체로 향하는 셔틀을 멀지 않은 곳에서 탈 수 있다. 어떤 차를 빌렸는지 아직 모르는 두근두근한 상태로 한쪽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걸어갔다. 렌터카와 3박 4일간의 숙소 예약 모두 채영이가 맡아서 수고해줬다. 시험 공부로 바빴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미리 내 몫의 돈만 넘겨주고 채영이에게 모든 예약을 맡겼다. 연인도 아닌데 엄청 까다롭고 머리 아픈 과제를 던져준 셈인데, 사실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설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의 시작은 비행기 예약부터 시작되고, 여행에서 가장 신나는 순간은 그날 묵을 숙소를 에어비앤비로 검색하는 순간이니까. 물론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 은근 갈등되는 지점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나라면 머리 아파 죽었을거야. 물어보지도 못하니까. 아무튼 나는 오늘 숙소가 호텔방 2개인지, 독채에 분리된 방 2개인지 조금은 궁금했지만.. 미리 물어보기보다는 그 호기심과 궁금함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어서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자기가 운전을 포함해서 제주도 가이드를 몽땅 하겠다고 큰소리 친 채영이가 운전 면허 등록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을 때는 조금 당황스러움과 도파민이 함께 터졌다. 꼬박 1년 만에 운전을 하는데, 처음 몰아보는 차에다가 좋아하는 여자를 옆에 태우고 처음 가는 길을 가야한다니. 운전에 대한 부담감은 없기 때문에 흥미진진하고 놀이기구 타는 기분으로 운전석에 앉았다. 다행인 점은 경차인 캐스퍼라는 점과 3훈비 병사 시절 이 소위의 차와 똑같은 녹색(국방색) 캐스퍼라는 점이었다. 여러번 타본 차라서 심리적 안정감이 묘하게 느껴졌다. 채영이한테 운전 코치를 당부하고 렌터카 업체 주차장을 나섰다. 중학생 시절 학원을 다니느라 매일 자전거를 탔던 것이 이럴 때 너무 큰 도움이 된다. 우회전할 때는 왼쪽에서 차 오는지 한번 보고, 사람이 앞에 오는지 확인하고, 신호 바뀌면 출발하고, 코너 돌 때는 속도 줄이고. 이런 것들은 자전거 탈 때와 똑~같다.
의외로 칭찬을 받으면서(채영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칭찬을 아주 능숙하게 한다.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물회를 먹으러 갔다. 자리물회였는데, 처음 먹어보는 생선이었다. 자리돔으로 만드는 음식이라는데 자리돔이라는 생선 자체를 처음 들어봤다. 채영이가 자주 와서 먹어본 동네 맛집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하기에 더 기대됐다. 맛이 기대됐다기 보다(물회 맛이 거기서 거기니까. 그리고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서 물회에 대한 기준이 꽤 높음) 채영이가 여러번 왔다고 한 식당이 어떻게 생겼을지, 그리고 채영이가 거기서 어떤 밥을 먹었을지가 더 궁금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초콜릿색으로 그을린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한라산에 얼큰하게 취해 계셨다. 음식이 나오기 전인데도 벌써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자리물회 2개가 나왔다 제피도 함께 나왔는데 잎을 취향껏 뜯어서 넣어 먹으니 더 별미처럼 느껴졌다. 채영이가 맛있냐고 슬며시 물어봤는데, 그냥 시원한 맛이지 뭐 특별한 맛은 아니라서 고개만 끄덕이면서 "음~ 맛있네~"라고 했다. 물회라서 빨간 육수에다가 얼음, 시원한 오이까지 곁들여졌지만 담백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런 물회였다. 이걸 먹으려 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동네에 산다면 나도 분명히 단골이 되었을 것 같다는 인상이 드는 식당이었다.
산뜻한 식사 후에는 길 건너 카페로 갔다. 새목이었나? 이곳도 채영이가 자주 왔다던 카페였다. 우리집 식탁 같은 갈색 나무 테이블과 현무암 스타일의 돌로 인테리어를 한 카페. 제주도에 있을 법한, 제주도와 어울리는 카페였다. 자리에 앉자 채영이가 갑자기 생각났다면서 선물을 꺼냈다. 직접 고른 스티커들과 블랙윙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스티커를 담은 봉투에는 '하트 seoro'라고 적혀있었다. 채영이는 하트는 내가 적은게 아니라 기본으로 인쇄되는 옵션이라고 부연 설명했지만, 나는 괜히 둘러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좋았다. 당신... 카페에서 선물 주려고 준비한 거 같은데... 아무튼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도 분명 중요할테지만 그 선물을 받아서 너무 좋았다. 나는 너무 좋으면 방방 뛰기 보다는 착 가라앉으면서 그걸 뚫어지게 쳐다보게 된다. 그 스티커와 연필도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만져봤다.
기회만 되면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일몰!
일몰 중에 최고는 바다 아래로 떨어지는 일몰이다. 태양은 높이 있을 땐 눈이 부셔서 보기 힘들지만, 지평선 가까이 내려오면 점점 붉어지면서 빛이 약해지기 때문에 쳐다볼 수가 있다. 너무 붉고, 강렬하고, 이글이글거리고, 크고, 주변을 물들이며, 우아하고, 고고하게 차츰 내려간다. 어쩔 땐 더 크고 어쩔 땐 조금 작지만 항상 너무 예쁘다. 태양이 떨어질 즈음 할 때부터, 바다에 가리기 시작하고, 조금씩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나는 너무 아쉬운 마음으로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게 된다. 이것은 내가 일출보다 일몰을 훨씬 더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출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상태로 기다리다가 갑자기 톡하고 나오면 그렇게 '일! 출!'이 똑 떨어져 완성된다면.. 반대로 일몰은 내가 그 과정을 처음부터 온전히 바라볼 수 있고 즐길 수 있으며 그 끝을 준비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절절히 아쉬워할 수 있다.
그렇게 제주도의 첫 일몰을 채영이와 함께 봤다. 뚫어지게 태양을 쳐다봤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쉬웠고, 점점 없어져가는 주황 유리구슬이 다시 올라오길 바랐지만 이번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ㅋㅋ. 바라보는 와중에도 모든 순간을 아쉬워하게 되는 것이 일몰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 내내 느꼈던 감정을 미리보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몰을 봤으니 해가 금새 졌고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가뿐히 밤길 운전을 해 오늘의 숙소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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